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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라 물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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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묵향이 묻어나는 추사고택
작성자 김종하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08-01-25 1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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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115

 예산읍내에서 북쪽으로 신례원을 지나 당진쪽으로 4km정도 가다보면 야트막한 둔덕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는가운데 그리높지 않은 용산을 뒤로하고 햇볕을 듬뿍받는 양지쪽에

반가의 기와집채가 앉아 있는데 그곳이 바로 추사고택이다.

 

추사는 이집에서 태어났으며 이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영조의 사위가 되었을때

당시 충청도의 53개고을에서 한 칸씩 부조하여 지었다 한다.

현재의 고택은 1970년대 보수하면서 36칸정도로 줄어든 것으로

사랑채 안채 대문채 그리고 사당이 있으며 본래는 곳간채가 더 있었다하나 지금은 없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오른쪽으로 비켜앉아 남향하여 있으며 윗쪽으로 안채의 외곽이 보인다.

 

 

사랑채는 여느 반가와 다르게 'ㄱ'자형으로,

꺽이는 부분에 대청을 두고 양쪽으로 방을 두었으며

대청쪽으로 난 문짝들을 모두 들어열개로 활짝열릴 수 있게 하여 필요시 하나의 큰 공간이 되도록 하였다.

 

잘 다듬은 높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운 모습이 가지런하다. 

첫눈에 정성이 많이 들어간 집임을 알 수 있다. 왜 아니겠는가.

임금이 사위한테 내린 집이니 서울의 내노라하는 목수들이 지었을 것이다.

 

 

안채는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ㅁ'자형의 집이며

원래 내외벽이라 하여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되었었다 하나 지금은 없다.

 

 

안채의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넓은 대청이 있고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각 방과 부엌이 딸려 있다.

겹집으로 중앙 6칸이 대청이며 대청과 좌우 양쪽의 방이 넓은 분합문으로 되어 있어

문을 열면 전체가 트이도록 되어 있는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양쪽에 있는 각 방은 부엌쪽으로 두 칸 크기의 넓은 벽장이 있으며

방의 뒷칸쪽으로는 반 칸 크기의 폭으로 길게 마루방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천정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 위에 종보를 올리고 그 위에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도록 했다.

도리위로 가지런히 내린 서까래가 마치 여인네의 곱게 빗은 머릿결 같다.

 

 

대청마루쪽의 문은 모두  들어열개로 하여 마당까지 트인공간이 되게하였다.

 

 

또한 안채는 정면의 중문을 닫으면 전체가 하나의 폐쇄공간이 되어

남녀유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택을 바라보아 왼쪽에는 추사의 묘가 있으며 묘 앞에는 큰 반송이 두 팔 벌리듯이 누워 있어

그 운치를 더해주며 엇그제 내린 눈의 잔설이 이를 더하는 듯 하다.

 

이 묘에는 추사외에 두 명의 부인과 함께 있다.

선생은 15세에 한산이씨를 맞아 결혼했으나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상처하고 만다.

그리고는 3년후에 예안이씨를 맞아 재혼하게 되는데 그 처가가 있는곳이 외암민속마을이다.

비록 부인에게서 자식을 얻지는 못했으나  남들이 부러울정도로 금실이 좋았다고..

 

 

고택의 오른쪽에는 추사의 증조할머니인 화순옹주의 묘가 있다.

그리고 묘 앞에는 정조가 내린 열녀문이 있다.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는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었는데

영조는 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괘씸하여

신하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뒤에 정조가 내린 것이다.

 

 

그곳에서 더 오른쪽으로 1km 정도 가면 추사의 고조묘가 있으며

그 앞에는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갔은때 종자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는

수령 200년이 되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이 한 그루 서 있다.

풍토가 맞지 않는지 공들여 보살피는데도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고택뒤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화암사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이는 증조부가 중건한 집안의 절이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이곳에 드나들며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화암사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가 있는 동안에도 절의 개축에 관여할 정도로 애정을 가진 곳으로

그곳에는 추사가 쓴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이 있으며 법당 뒷편 바위절벽에는

추사의 "시경","천축고 선생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추사고택 앞쪽에 하나의 볼거리가 또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공사가 한창인데 추사기념관이 바로 그것이며 올 년말쯤에는 추사에 관한

또 다른 볼거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추사는 명문 세도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당대의 최고의 실학자인 박제가로부터 사사를 받아

일찍이 학문에 눈을 떳으며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갔을때 당대 최고의 석학 완원, 옹방강 같은 이를

만나면서 고증학에 빠져들게 되었다. 

추사체로서 서예의 큰 획을 그은 그가 이룬 큰 업적가운데 하나는 바로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의 발견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학대사비로 알려져 있던 비를

추사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 냄으로서 진흥왕대의 신라를 규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추사가 말년에 과천에 머물면서 쓴 글이 있다.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 )

 

풀이하면

 

"세상에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주의 모임이다."

 

추사는 자식복이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누릴대로 누린 부귀영화,  9년이 넘는 혹독한 귀양살이를 겪은 

노객의 삶에 대한 통찰을 엿 볼 수 있는 글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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